격동의 역사 속 미술로 대화하던 한일…80년 예술 교류의 자취

윤여경 기자

등록 2026-05-13 11:59

격동의 역사 속 미술로 대화하던 한일…80년 예술 교류의 자취


국립현대미술관·日요코하마미술관 공동주최…양국 미술교류사 되짚어


백남준·다카마츠 지로 등 양국 43명 작가 작품 200여 점 소개


'로드 무비: 1945년 이후 한·일 미술' 전시 전경'로드 무비: 1945년 이후 한·일 미술' 전시 전경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박의래 기자 = 1964년 5월 24일 일본 아방가르드 예술의 진원지였던 도쿄 소게츠 아트 센터에 백남준(1932∼2006)이 등장한다.


백남준은 자기 머리에 세제를 쏟거나 피아노를 부수고, 옷을 입은 채 욕조 안에서 몸을 씻는 등의 파격적인 행위를 보여줬다.


이 장면은 일본의 전위 예술 현장을 촬영한 사진가 '히라타 미노루'의 카메라에 담겼다. 그의 사진들은 백남준 예술의 초기 단계를 보여주는 핵심적인 기록물이자 양국 예술가 협업의 한 장면을 보여준다.


히라타 미노루 작 '백남준 작품 발표회, 소게츠 아트 센터'히라타 미노루 작 '백남준 작품 발표회, 소게츠 아트 센터'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두 나라인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식민지와 전쟁, 분단과 갈등 등 복잡한 역사 속에서 요동쳐 왔다.


하지만 한·일 양국 예술가들은 각기 다른 상황에도 국경을 넘나들며 교류를 이어왔다.


국립현대미술관(MMCA)과 일본 요코하마미술관(YMA) 공동주최 전시 '로드 무비: 1945년 이후 한·일 미술'이 오는 14일부터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열린다.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을 기념해 1945년부터 현재까지 80년간 이어온 양국 미술 교류의 여정을 백남준과 이불, 이우환, 정연두, 다나카 고키, 다카마츠 지로, 무라카미 다카시 등 양국 작가 43명(팀)의 작품 200여 점을 통해 되짚어 보는 자리다. 지난해 요코하마미술관에서 먼저 열렸고,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이어진다.


조양규 작 '밀폐된 창고'조양규 작 '밀폐된 창고'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전시의 출발점은 해방 이후 일본에 남은 재일조선인 예술가들이다. 이들은 식민지의 잔재와 분단이라는 이중의 조건 속에서 예술을 이어갔다.


조양규의 1957년 작 '밀폐된 창고'는 재일조선인 미술가의 등장 계기와 그들이 일본에서 경험한 비참한 삶의 단면을 보여준다.


노동 현장의 어둡고 폐쇄적인 공간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으로, 재일조선인의 척박한 삶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동시에 남북 분단과 북송이라는 역사적 선택 앞에 놓였던 개인의 운명을 상기시킨다.


백남준 작 '바이 바이 키플링' 中백남준 작 '바이 바이 키플링' 中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백남준은 양국 예술 교류의 중심이 되는 인물이다.


1986년 작 '바이 바이 키플링'은 이번 전시의 핵심 축이 되는 작품이다. 백남준은 서울·도쿄·뉴욕을 위성으로 연결해 실시간 소통하며 "동양은 동양, 서양은 서양, 둘은 결코 만날 수 없다"라고 단언했던 영국의 소설가 러디어드 키플링의 선언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작품 속에서는 한국의 전통춤과 미국의 대중음악, 일본의 전위 예술이 실시간으로 교차한다. 미국의 루 리드, 필립 글래스, 키스 해링과 일본의 사카모토 류이치, 이세이 미야케 등 당대 예술가들이 참여해 텔레비전이라는 매체가 국가와 문화의 경계를 허무는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입증했다.


이우환 작 '선으로부터'이우환 작 '선으로부터'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두 나라의 미술 교류는 제도적 기반 위에서 본격적으로 확대된다.


일본에서 한국 현대미술을 소개하는 전시가 잇따라 열리고, 이우환 등을 매개로 작가와 화랑 간 네트워크가 형성되며 양국 미술계의 접점이 한층 구체화했다. 이러한 흐름은 이후 지역과 세대를 넘어서는 보다 다층적인 교류의 토대가 됐다.


이불 작 '사이보그 W5'이불 작 '사이보그 W5'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1990년대 이후 한·일 교류는 제도 중심에서 개인과 네트워크 중심으로 이동한다. 이 시기 등장한 젊은 작가들은 매체와 주제 모두에서 새로운 감각을 보여준다.


이불의 '사이보그 W5'는 이러한 변화의 상징적인 작품이다. 매끈한 표면의 인체 조각은 미래적이고 완벽해 보이지만, 머리나 팔다리가 결여된 불완전한 형태를 띤다.


기술 문명 속 인간 신체에 대한 이상과 불안을 함께 드러낸 작품으로 평가된다. 동시에 전통적인 여성 신체 재현을 전복하며, 인간과 기계,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법적 경계를 해체한다.


다나카 고키 작 '다치기 쉬운 역사들(로드 무비)' 中다나카 고키 작 '다치기 쉬운 역사들(로드 무비)' 中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2000년대 들어서면서 양국 예술가들은 동일본 대지진, 재일조선인 차별, 역사 인식 문제 등 두 나라가 공유하는 상처를 다룬다. 과거의 교류가 단순한 영향 관계였다면, 오늘날의 교류는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모색하는 단계로 나아갔음을 시사한다.


다나카 고키의 2018년 작 '다치기 쉬운 역사들(로드 무비)'은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의 조선인 학살에서부터 최근 가와사키에서 발생한 한국인 혐오 시위에 이르기까지, 과거와 현재의 사건들을 교차시키는 영상 작업이다.


작가는 재난과 차별의 역사 앞에서 서로 다른 위치에 선 이들이 어떻게 연대할 수 있는지를 질문한다.


김성희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은 "두 나라가 경험한 역사적 순간과 그 속에서 형성된 미술 교류의 흔적을 되짚는 자리"라며 "한·일 현대미술의 가능성을 새롭게 발견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전시는 9월 27일까지.


'로드 무비: 1945년 이후 한·일 미술' 전시 전경'로드 무비: 1945년 이후 한·일 미술' 전시 전경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laecorp@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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